1. 무심코 손이 닿은 오래된 물건 하나
어느 날 방을 정리하다가 평소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던 구석을 들여다보게 되었다. 자주 열지 않는 서랍 아래,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작은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. 먼지가 살짝 쌓여 있었고, 겉모습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상자였다. 굳이 열어볼 생각은 없었지만, 이상하게도 그날은 손이 먼저 움직였다. 뚜껑을 여는 순간, 오래된 종이 냄새와 함께 잊고 지냈던 시간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.
그 안에는 예전에 쓰던 메모지 몇 장과 낡은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. 사진 속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고, 표정은 지금보다 조금 더 단순해 보였다. 그때는 그저 웃고 있었을 뿐인데, 그 웃음이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. 그 시절의 나는 무엇을 고민했고, 무엇을 두려워했을까.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지만, 동시에 분명히 ‘나’였다는 사실이 묘하게 다가왔다.
메모지에는 사소한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. 당시에 좋아하던 노래 가사 일부, 해야 할 일 목록, 의미 없이 적어 내려간 감정의 조각들. 그때는 분명 중요한 마음이었을 텐데, 지금의 나는 그 문장들을 읽으며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. 그만큼 시간이 흘렀고, 나 역시 그 시간만큼 변해 있었던 것이다. 방 한구석에서 발견한 이 작은 상자는,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내가 지나온 시간의 일부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.

2.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마주한 순간
추억이라는 건 참 묘하다. 일부러 떠올리려고 하면 잘 떠오르지 않다가도, 이렇게 우연히 마주하면 생각보다 선명하게 다가온다. 상자 속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다 보니, 그 시절의 감정들이 조용히 되살아났다. 괜히 불안해하던 날들, 사소한 일에도 쉽게 들뜨던 순간들, 그리고 이유 없이 지쳐 있던 시간들까지. 그 모든 감정들이 아주 얇은 종이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.
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더 조급했고, 무엇이든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믿었다.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, 혹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던 시간이 많았다. 그래서 메모지 속 문장들도 어딘가 급했고,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는 말들이 유난히 많았다. 이 정도로는 부족해, 더 잘해야 해 같은 문장을 읽으며, 그때의 나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. 그저 최선을 다하고 있었을 뿐인데, 너무 엄격하게 대했던 건 아닐까 싶었다.
지금의 나는 그때보다는 조금 느슨해졌고, 조금 더 나에게 관대해졌다.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, 실수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. 그래서인지 그 시절의 기록들이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. 그때의 나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.
방 한구석에서 발견한 이 추억은,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지금의 나를 더 이해하게 해주었다. 그 시절의 선택과 고민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이만큼 숨을 고르며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. 과거의 나는 미완성처럼 보였지만, 사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는 한 페이지였다.
3. 정리하지 않고 남겨두기로 한 이유
상자를 다시 닫으면서 잠시 고민했다. 이 물건들을 이제는 버려도 될까, 아니면 다시 서랍 깊숙이 넣어둘까. 솔직히 말하면,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. 지금의 삶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, 다시 사용할 일도 없을 것이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상자를 그대로 두기로 했다. 완전히 정리해버리기엔, 그 안에 담긴 시간이 너무 조용히 의미 있었기 때문이다.
추억은 꼭 자주 꺼내 보지 않아도 된다. 다만, 필요할 때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. 방 한구석에 남겨진 그 상자는, 내가 어디서부터 걸어왔는지를 잊지 않게 해주는 작은 표식 같았다.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지나 지금의 나 또한 과거가 되었을 때, 또 다른 나에게 이런 추억 한 조각을 남겨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.
정리를 하며 깨달았다. 모든 것을 깔끔하게 비워야만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을. 어떤 것들은 조금 불편하고, 조금 오래되었어도 그 자리에 남아 있음으로써 의미를 가진다. 그 상자는 여전히 방의 구석에 있지만, 이제는 전처럼 무심히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. 그곳에는 분명 내가 지나온 시간이 숨 쉬고 있으니까.
언젠가 또 마음이 복잡해지는 날이 오면, 나는 다시 그 상자를 열어볼지도 모른다. 그리고 그 안에서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건네는 과거의 나를 만날 것이다. 방 한구석에서 발견한 이 작은 추억은, 그렇게 나의 시간을 조용히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. 필요 이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, 분명히 존재하는 한 조각으로.